에이전트 수십 개를 돌린다고 AI를 잘 쓰는 게 아니다
에이전트 수십 개를 돌린다고 AI를 잘 쓰는 게 아니다 - AI력 Review
배경: AI 에이전트 수십 개를 운영하면서도 경영진 앞에서 "Generic하다"는 피드백을 받은 경험이 이 책의 질문과 정확히 겹쳤다. Doer와 Innovator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읽었다.
수십 개의 AI 에이전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프롬프트를 깎고, 파이프라인을 짜고, 자동화 커버리지를 매주 끌어올립니다. 회의 때마다 새로운 수치를 들이밀고, 효율이 몇 퍼센트 올랐다고 보고합니다. 동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돌려요?"라고 물으면, 속으로 좀 뿌듯했습니다.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그 자신감에 금이 갔습니다.
저자는 AI 역량을 하나의 공식으로 풀어냅니다. $$인간의 역량 \times AI의 확장력$$. 핵심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라는 데 있습니다. 곱셈이니까, 한쪽이 0이면 결과도 0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해도, 사람이 빈칸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인간 쪽이 단단하면, 같은 도구라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단순하지만 불편한 공식입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얼마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경영진에게 자동화 프로젝트 결과를 보고했을 때, 돌아온 말은 "너무 일반적이다"였습니다. 기술 지표에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커버리지도 올랐고, 처리 시간도 단축됐고, 에러율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비즈니스에 뭐가 달라지나요?"라는 질문 앞에서 저는 말이 막혔습니다. 숫자는 있었지만, 해석이 없었습니다. 데이터는 쌓여 있었지만, 그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 판단이 빠진 자리를, AI가 뱉어낸 기계적인 평균값이 조용히 채우고 있었습니다. 코드가 돌아간다고 좋은 소프트웨어가 아니고, 숫자가 나온다고 좋은 분석이 아니듯, 저는 지시를 잘 따르는 실행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AI력 공식에서 인간 역량 쪽에 빈칸을 남겨두고 있었던 겁니다.
저자의 이력이 이 주장에 무게를 실어줍니다. TRIZ라는 기술 혁신 방법론을 현장에서 오래 적용해 온 사람이, "모순을 먼저 정의하라"고 말합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정밀한 지시문 작성이라고만 여기던 저에게, 이건 뼈아픈 지적이었습니다. 모순을 발견하고, AI의 답에서 빠진 것을 짚어내고, 방향을 재설정하는 일. 그건 지시문을 잘 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입니다.
타이핑이 빠르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게 아니듯, 프롬프트를 잘 쓴다고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책의 일부 사례는 이미 아는 내용이었고, TRIZ 프레임워크를 AI에 대입하는 과정이 다소 도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핵심 질문의 날카로움만큼은 빗겨갈 수 없었습니다. 도구를 잘 쓰는 사람과, 도구로 문제를 재정의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저자는 그 간극을 끝까지 파고듭니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면, 아마 제대로 읽은 겁니다.
가장 깊이 고민하게 만든 대목은 협업 지능입니다. 우리는 자꾸 그렇게 쓰게 됩니다.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AI에게 논거를 요청합니다. "이 방향이 맞다는 근거를 찾아줘." AI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럴싸한 답을 척척 내놓습니다.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그 편향을 알면서도 모른 척합니다. 확증 편향을 증폭시키는 거울 앞에서, 거울을 탓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자는 이걸 협업 지능의 부재라고 부릅니다. AI에게 질문하는 건 쉽습니다. AI의 답에서 빠진 걸 읽는 건 어렵습니다. 저자는 후자를 "듣기 지능"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이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AI에게 말을 잘 시키는 데만 집중하지, AI가 하지 않은 말에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같은 땅이라도 어떤 씨앗을 뿌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자라듯, 질문의 질이 도구의 쓸모를 결정합니다. 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의 질문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내가 이끄는 에이전트들과 프로젝트들은 혁신가의 결과물인가, 실행자의 결과물인가. 솔직히 대답하면, 둘 다입니다. 기술적 실행은 검증됐습니다. 자동화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팀원들은 편해졌고,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성과는 있습니다. 그런데 비즈니스의 언어로 가치를 번역하는 일에서는 여전히 빈 곳이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찍어주는 최단 경로만 따라가는 운전자처럼, 길은 알지만 지름길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목적지에 도착은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를 정한 건 내가 아니라 기계였습니다. 아는 것을 잘 아는 건 기술이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건 용기입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순간, 비로소 곱셈의 앞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속도는 이제 누구나 낼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AI가 바닥을 깔아주니까요. 결국 살아남는 건, 방향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은 뒤, 매일의 루틴이 달리 보입니다. 우리는 매일 AI와 마주합니다. 프롬프트를 쓰고, 결과를 확인하고, 다음 일로 넘어갑니다. 익숙한 반복입니다. 그 반복 속에서 방향을 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관성대로 달리고만 있는 건지. 한 번쯤 멈춰서, 물어볼 때입니다. 곱셈의 앞자리를 비워둔 채 뒷자리만 키우고 있다면, 결국 답은 0에 수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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