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메모를 하는가?
본격 사회생활의 시작, 메모의 필요성을 깨우치다.
왜 메모를 하는가?
짧지만 쉽지 않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처음 메모를 진지하게 시작하였던 때로 돌아가 본다.
먼저 떠오르는 시점은 바로 군 복무 시절이었다. 군 복무 시절, 27개월간 지내게 될 부대로 배치가 되었을 때였다. 나름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갔으니,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군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외부와는 차단되어서 온전히 새로운 지식을 쌓아야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내 보직은 상황병으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긴장감 속에 지속 전달해야 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아주 기본적인 정보의 경우 기본적으로 반드시 암기하고 있어야 했다. 간단하게는 여러 부서의 전화번호였고, 복잡하기로는 여러 다국적 유관부서와 함께 업무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메모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긴장감 속의 구석에서 있던 스프링 노트를 꺼내서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체로 제목에는 밑줄을 긋고, 그 아래 세부적인 내용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메모 덕분에 나는 담당한 업무를 조금 더 빨리할 수 있었다. 동시에 노트의 뒤편에 일기를 작성하면서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던 상황 속에 나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는 군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때 양식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모든 내용을 하나의 노트에 모아서 작성했기 때문이다. 내용을 찾고 싶을 때는 다이어리 특성을 살려 앞부터 일자의 순서대로 작성한 탓에 앞 페이지부터 빠르게 순차적으로 찾아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목에는 두 줄로 내용과 구분을 해놓았기 때문에 필요한 내용이 있을 때마다 빠르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목은 이후에 내용을 찾아볼 필요성을 감안하여 작성해야 했겠지만, 당시에는 접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으로 야기되는 허들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본 페이지는 끝이 접혀 있었기 때문에 내 노트는 검색하기에도 충분하게 진화해 있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부터 시작된 업무메모
끝이 없을 듯이 늘어나던 메모와, 그 메모에 의지하던 나의 업무수행 방식은 자연스레 신병으로부터 탈출하면서 빠르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적절히 메모해 놓은 내용에 변경을 가져가면서 유연성 있게 업무를 대하기 시작하였고 업무와 관련된 메모의 양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대신 다른 쪽의 메모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제대하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메모였다. 특히 내가 있던 군대는 정말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3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해외 유수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많았다. 이미 오랜 시간 일을 하다가 온 분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경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서 대화하다 보니 지식의 범위가 정말 넓어졌다. 그 덕분에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같은 책들도 알게 되었고, 원래 책을 좋아했었지만, 기존에는 잘 읽지 않던 경제경영 서적을 집중해서 읽게 된 것 같다.
그때 읽게 된 책 중의 하나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과 프랭클린 플래너였다. 입대 이전에 너무 놀았던 탓에, 제대 이후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은 삶의 이정표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힌트를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을 바탕으로 역할 관점에서 삶을 "개인", "아들", "학생" 등으로 나눈 후 사명을 세우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각 목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부분들을 함께 메모하였다.
이러한 메모들은 목표를 왜 그렇게 수행하고 완료하였으며 수립하였는가에 대한 근거가 되었고, 이렇게 작성한 메모들이 쌓임에 따라 자기암시를 위한 문장이 되어 실행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를 아는 학교 동료들은 군대 전후의 내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다만 이때까지의 메모는 군인을 제외한 다른 역할은 경험할 수 없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메모의 양 대비 개인적인 생각에 대한 내용은 군인 역할을 제외하고는 다소 깊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메모를 작성하는 방식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되, 칸을 나누어 역할별로 쓰는 정도만 다소 추가되었던 것 같다. 특히 이렇게 칸을 나누더라도 비계획적으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메모를 작성하는 것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대하고 나니 상황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통제된 군대를 벗어나기 시작하니 불규칙하게 치고 들어오는 일이 많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들의 우선순위를 산정하는 방식은 매우 주관적이었기 때문에 업무를 하더라도 업무를 다 끝낸 것 같지 않은 피로감에 계속해서 시달리게 된다. 기존 계획한 업무에 대한 컨트롤을 못 하게 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Top-down으로 세우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대안을 찾게 되는데 그 대안은 바로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이 제안한 "Get Things Done(GTD)" 방식이었다. 실제 업무처리 기반의 경험을 살려 만들어진 GTD는 물같이 흐르는 마음가짐(Mind like Water)을 만들기 위해서 위임을 포함한 일종의 워크플로 형태로 구성된 Bottom-up 방식의 업무처리 방식이다. GTD 기반의 업무처리방식을 도입한 이후, 나는 계속 이 방식을 쓰고 있으며 해당 방식을 지금은 조금씩 개조시켜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메모도 방식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역할 기반으로 메모하던 것에서 벗어나 업무 기반으로 메모하면서 필요할 경우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묶는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이제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온라인 카페를 개인만을 위해서 개설한 이후 게시판을 생성하는 식으로도 내용을 정리하였지만, 이전에 사둔 프랭클린 플래너를 버리기에는 가격이 상당하였던 지라, 기존 양식을 활용하여 좌측에는 들어오는 업무들을 나열하고 우측에는 관련된 메모를 하는 식으로 우선 메모를 작성하였다.
프랭클린 플래너를 어느 정도 다 쓰고 난 이후부터는 미도리 트래블러스 노트나, 복면 사과 등의 노트와 만년필을 통해서 스스로 양식을 만들어서 메모를 해왔으며 그 덕에 한동안 노트와 만년필 지름에 푹 빠져 살았던 것 같다. 아이패드가 생긴 이후에는 주로 굿 노트(Good notes)를 사용해서 메모하다가 2019년부터는 롬 리서치(Roam Research)를 거쳐 옵시디안(Obsidian)에 메모는 분리해서 하고 있으며 일정은 옴니 포커스(Omni focus)를 이용해서 관리하고 있다.
의미있는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메모합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던 중 나를 더욱 본격적으로 메모에 대해서 고민하도록 가이드한 책이 있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였다. 그는 감정의 기복과 상관없이 꾸준히 오랜 시간 기록한 학자로서 곤충학부터 철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70여 권의 책을 ? 1만여 장에 달하는 논문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세운 몇 가지 원칙에 기반해서 시간을 관리했고 최종적으로는 필요한 시간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삶의 가시성을 극대화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삶을 다룬 짧게 다룬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삶의 가시성을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메모의 체계화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메모의 체계화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책이구나 잠깐 생각하고 삶에 대한 변화의 의지는 금세 기억 저편으로 잊혀지게 된다.
여기에 기름을 추가로 부은 책이 있으니, 바로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사회생활 중에 점차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일하게 되면서 코칭에 관해 관심이 생기던 차에 소개받은 책이었다. 저자인 알렉스 룽고라는 외국인이 한국어로 쓴 이 책은 제목이 의미하는 바처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자기 생각과 해결 방안을 저술한 책이다. 그는 삶에서 의미를 기반으로 계획을 세움으로써 살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정말로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은 코칭을 받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추천해 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전에 경험하였던 프랭클린 플래너와 GTD를 나에게 적합하도록 통합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겠다. 게다가 내 전반의 삶의 경험을 통합하고 체계화함으로써 가시성을 높이고 새로운 내용을 창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의 후손에게 남길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내 삶 속의 가치를 발굴할 수 있도록 삶을 명료하고 투명하게 관리하며 그 속에서 스치고 지나간 찰나의 생각을 깊게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점차 메모는 옵션이 아니라 삶의 당연한 하나의 과업으로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제 메모는 나에게 삶을 관리한 중요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과업은 적당한 늘어짐과 긴장감의 사이클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며, 마지막 숨을 뱉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다. 작품으로서, 의미로써 나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계속 메모를 해오고 있으며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