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삶의 설계에 대한 거칠지만 솔직한 자기고백,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왜 읽으려고 했을까? 사실 정확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회사의 상사 역시 이 책을 통해서 회고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도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 작가 정도로 기억에 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가지고 왜 이렇게 활용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이 이 책을 동일한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렇게 고민 끝에 읽으려고 했다. 아니 사실 다른 책을 읽으려고 하던 차에 굉장히 신경이 쓰여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첫 장부터 그는 자신의 직업을 절하하는 느낌의 말투를 구사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내가 하면 크게 뭐 웃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나름 “대가”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읽어보면서 왜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지 이해가 되었다. 이전에 “영혼의 승부”라는 책에서 문학이든 이학이든 공학이든 극의에 다르면 예술이 된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이 뇌리를 강하게 스쳤고,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첫 책에서 모든 사람은 소설가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었다.
중요한 그 이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글로 드러내기도 하고 각 연령 때의 자신을 꺼내서 글로 작성해 보고 있음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글을 꺼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다듬는지 이야기를 중간중간 언급하는데, 최근에 보았던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이 기억났다. 책의 저자는 동양적 세계관에서 삶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삶마저도 모두 의지에 일치한 형태로 바꾸는 사람의 예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그러했다.
그는”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표면적인 제목을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신의 삶 전체를 소설가로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삶의 패턴을 바꾸고, 감정에 충실히 하려고 애쓰며, 필요하지 않은 것을 덜어내기 위한 과정을 글로 쓰고 있었다. 이 책이야 말로 업 = 소설가 = 나라는 것을 충실히 설명하기 위한 글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면을 쓰고 산다. 아버지이면서 나이면서 자식이면서 직원으로서 산다. 일개 시민도 이렇게 많은 가면을 쓴다. 그리고 가면이 어떠한 의미인지 상관없이 피로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가면별로 다른 언어도 구사해야 하고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가면을 조금씩 없애면서 자신의 삶을 소설가라는 업에 최적화해 나가고 있었다.
가벼운 글일수록, 그 무게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그러했다. 우리 모두 삶에서 진중할 때가 있지만, 진중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때가 더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삶을 대하는 자세부터 고민함으로써 사람 자체의 아우라를 신뢰감 있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자는 이런 생각을 갖지도 않고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노력 속에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무게가 느껴지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당연한 글에서 그 당연함을 만들어온 무게를 담담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형태의 글은 빠르게 넘겨보면서 요점을 찾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의 글은 전반에 걸쳐서 정수로서 나에게 느껴져 정말 감탄하면서 읽게 되었다.
글의 서두에 왜 사람들이 이 책을 가지고 회고를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을 모두 덮고 나니 최근 읽은 책 “Same as Ever(불변의 법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아니 대부분 알 수도 있었던 불변의 규칙을 두고 우리는 삶을 그냥 살 때가 많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저런 삶을 희망하면서도 그 삶을 지탱하는 의지는 없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존중을 표할 수밖에 없었고, 삶 역시 소설과 같은 예술로 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책에 대한 소장의지가 자연스레 올라왔다. 좋은 책이었다.